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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과의 대화.. 인식의 규격화는 강물의 흐름을 규정하는 것..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인식작용의 원리. 거기에 자신이 비춰지고 표현이 된다.

煌錦笑年 2018. 1. 12.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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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글은 꽃망울 님에 대한 답글 성격으로 작성한 것이 아니며,


최초 답글이 없던 시점에 

글을 남기신 독자 '자하' 님의 질문 일부내용에 달리 견해가 들어 작성해 나가다 보니 

작성량이 길어 져 타이핑이 지속되는 사이에 

방문하여 글을 남긴 꽃망울 님의 3가지 견해가 먼저 달려 있었던 탓에 그 다음 4번째 답글로 자리하다 보니


이것이 독자 꽃망울님 에게는 자신의 견해에 대한 것으로 보였던 것인지

다시 그 아래로 내용이 이어지며 꽃망울 독자의 개인 피력 내용들이 그의 특유의 열정으로 망울져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맨 하단의 본 내용은

독자 "자하" 님이 남기신 질의사항 중 어떤 일부 표현들에 관한  

개인적 독백 형식의 소견 임을 밝힌다..


아울러,



P.S : 독자 꽃망울님에게


어제 최초의 답글에서 님은  '... 추종하는 사람들 '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는데, 

그런 표현은 개인의 인식의 지평과 구조의 민낯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분리주의적인 표현입니다.


또한, 이는 당신이 지닌 개인적 편견의 생김새를 드러내는 민낯의 일부가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인식의 거울작용을 다시금 말하게 되었고,

이것은 기억하기로 세 번째이며,

' 제 얼굴이 못났는데 어찌 거울을 탓하랴...' 라는 성경의 표현을 결국 인용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어둠의 자들이 흩뿌리는 가짜 뉴스들이 행성적 방향성의 독소로 작용하는 현상들을 목도하는 것으로부터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던 것으로 비춰져 보이게 됩니다.


가짜뉴스들이 판단능력이 부재한 자들에게 떠 먹여지고, 

그것으로 분리주의적 비난을 해대는 사회적 몸살의 현상을 모두가 지나오며 목도하지 않았던가요.


더 나아가 자신이 그러한 방식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자체가 아눈나키들이 남긴 역사적 독소이자

유전적 제한성의 후유증 이라는 사실을 본 블로그를 통해 읽어 봤을 지언정,

진정한 의미를 아직은 체득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거론하는바,

인간은 본디 생각과 감정, 마음과 의식이 통합적으로 융합하여 

내면으로부터 신을 지향하도록 하는 전일성과 통일성을 말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눈나키들은 양자의 경계 사이에 분리의 칩을 심었고,

행성의 역사는 이해와 연결이 아닌, 분리와 갈등의 방식으로

역전된 머카바 체계로 흘러 가도록 의도했던 것 임을 다시금 말하고자 합니다. 


5차원 의식이 무르익어 간다는 것은 편견에 의한 프레임화, 분리주의가

보르텍스의 구조를 거쳐 에너지 모멘텀의 변경을 따라,

신으로 나아가는 통합성과 전일성의 방식으로 변형이 되어 나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정도에 무관하게 천천히 이것을 체험해 나가게 될 것이고,

행성의 그리드를 타고 흘러 들어오는 입자와 반입자 융합에 따른 지속적인 차원 웨이브들을 맞이하며

유전적 활성화 과정들을 통해 낡은 시대의 모든 편견들이 융해되고

신의 방식에 해당하는 방향의 것들만 남는 지상의 일부로써 역시 신의 방향성으로 그들의 의식이

전환적인 진화여정을 지나가고 있음을 어느날 더욱 깊이 각인하게 될 것 입니다.


이상의 나의 표현들은

불교철학이 언급했던 핵심적인 가르침들, 오늘날 까지도 올바르게 살아 있는 성서 구문의 일부, 

혹은 유란시아북의 학생들이 이미 읽었을 인간의 의식에 관한 일부 구문들, 

위대한 천재들이 남기고 축성한 양자장론들의 본질과 

태상천자 노자 선생의 도덕경의 성상편의 기본 원리,

2천년전, 멜기세덱 창조자 그룹들이 지상으로 전했던 일부 내용들이 거론했던 


" 창조의 본질 " 들에 관한 지극히 일부 표현에 불과합니다.


참된 학생은 그 거울을 닦는데 있지, 단편적으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의식이란 그 의식을 바라보는 의식입니다.

마음을 바라보는 마음은 더 큰 바구니 사이즈를 지닌 마음이고

자라는 마음들이 어디로 도달할 것인가..를 시대적으로 인지하고 빛과 사랑으로 이끌도록 합니다.


그리고 이를 올곧게 안내하는 예수의 대화법과 

그가 사람들과 나눈 그의 대화방식들을 어제 거론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나는 늦은 밤 귀가했던 나는 피곤했고, 천천히 오전의 태양 아래에서 이상의 글을 씁니다.


우주와 인간은 만물의 근원을 지향하며 공존합니다.


이 과정을 규정짓게 되면 그 자신이 규정되고 마는 함정이 적어도 이러한 차원계에서는 

곳곳에 널려 있음을 잘 인지하세요. 쉽게 발을 헛디디도록 교묘히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높은 차원적 세계로 갈수록, 그들의 사고가 곧바로 형상화 되고 물질화 되기 때문에

높은 차원 영역들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지구와 같이 교묘한 거짓이나 기만들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오직 지구와 같은 행성에서만 기만과 가짜뉴스들, 거짓들이 횡행하고 있고,

그래서 물질적 행성 학교들로 불리우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행성 지구는 아눈나키들에 의한 피보나치 에너지 확산 방식에 의한 독소들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습니다.


교육시스템에 중실하여 사회적 지식인으로 성장한 아이들의 상당수가 

이 세계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동참하여 왔고,


이것이 직관적으로 결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아이들의 상당수는 

이 세계를 전환시키는 방식으로 흘러갑니다.


바로 이러한 개인들의 인식과 창조에 의해 

각자 스스로가 형성하는 머카바의 회전 방식이 서로 그 극성을 달리합니다.

빛과 어둠, 흑백논리의 본질이 여기에 있습니다.


신의 방식과 반신성의 구분은 명확 해야만 합니다.

뉴에이지의 실패는 이러한 양자간의 명확성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마약이 주입된 타락한 역사의 일부로 자리하고 말았기 때문이고 그 배후에는 DS - CIA 가 있었습니다.


이처럼 극성을 뒤집어 놓으면 창조질서에 위배가 되며,

삼위일체의 대전제와 태초의 근원의 방식을 벗어나려고 하면

이는 루시퍼 할애비의 할애비들이 몰려 와도 이겨낼 수 없는 

영원한 근원의 마음의 방식 입니다.



마음의 바구니 사이즈가 넓어져 가는 것은 더욱 깊은 내면의 필드로 자신의 의식이 깊어지는 것이고

깊어질 수록, 편견이나 획일적 인식이 아닌,

실체에 대한 통시적 이해와 통합적 시간개념 (주파수 레이어) 을 보는 것 입니다.


여기에서 어둠의 자들은 역전된 머카바를 의도하고

빛의 존재들은 올곧은 머카바를 지속합니다.


끝까지 살아 남은 성서의 한 표현으로 

" 네가 너희들의 주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 그 신심이 덥지도 찹지도 않은 어중간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 라는 표현이

바로 이 내용을 의미합니다.


결국 개인의 심판은 개인이 스스로 짓는 것 입니다.


심판은 벌을 주는 개념이 아닙니다.

자신의 요 앞의 의식의 진동수 영역에 대한 길 안내는 개인의 영혼의 선택으로 결정이 됨을 의미하지만


행성 지구가 거쳐가고 있는 성서와 모든 예언서들이 언급했건 수확의 시대 The age of Harvest 는

곧 진화적 여정에서의 개인들의 구원과 심판의 시기를 언급했던 것 입니다.


인류를 멸절시키고 행성의 그리드에 반신성의 압력을 가하여

행성 내파를 통해 인류를 소멸시키려고 의도했던 것은 아눈나키들 이었고,

이러한 파괴적 메커니즘에 관해 이용한 것이

분리된 의식과 마음이 피워 내는 두려움의 방식 이었습니다.


왜냐면 두려움이란 사랑의 반대 극성을 지니며 신의 본질과 가장 멀리 떨어지도록 하는

어둠의 방식들 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종류의 두려움들을 직시하고 해결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하의, 독자분 자하' 님의 표현 구문에 대한 개인적 소견을 독백 형식으로 답글을 작성해 나갔던 것이고

그 사이에 꽃망울님의 답글 3개가 달려

나의 독백성 소견은 4번째가 되었고

그 다음으로 의도와는 달리 꽃망울 님의 또다른 내용들이 이어지는 해프닝을 나는 봅니다.


그러나 두 의제를 통합적으로 잇는 것으로 마무리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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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하
  • 2018.01.11 11:33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중략)


우리가 두려움이 생기는것은 모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중략)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이고 배우면 되는 것이지 이것이 왜 두려움으로 작용하는가.

경쟁주의를 부추긴 낮아진 교육완성 주의가 주입한 자기완성의 강박관념은 아닐까.


보통 인간의 무지는 전체를 못보는 통시성과 통합성이 부족으로부터 개인적 시대적 인식의 프레임의 제한성이

단견이나 편견을 가져오는 경향들이 크고 이러한 경향들이 역사를 통해 증명이 되어 왔다.

규정하는 순간 규정 당하는 것이고,

이것이 아눈나키들이 남긴 최대의 후유증의 하나이다.


자신의 무지가 두려움으로 오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만 한다는 개인적 강박관념은 아닐런지..

학창 시절, 경쟁적인 성향을 지닌 수재지향 유형의 학생들이 가끔 보이는 조급함들.

그러한 조급함들이 개인의 발전의 원동력이나 열정으로 작용했을 지언정,

그것은 단지 기존의 지식유형 사회가 길들이고 만들어 낸 깍여 나간 수재유형들이 대부분이다.


그렇게 자신을 재촉한 이래로 

참된 생명의 지식과 지혜로 이어지는 어떤 통합성이나 통시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오히려 경쟁사회 특유의 분리주의들 출세변형 주의의 모체로 작용하고

이것은 특히 한국사회에서는 천민자본주의 유형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고 마는 아눈나키들의 죽음의 머카바 방식으로 

시대 전체가 인지하지 못한채 빨려 들어갔던 것은 아닌가.


결국 이러한 모순적 현실들은 곧 계급주의로 이어지고, 규격화된 사고체계를 불러와 지배의 카르마를 떠 먹이는 

분리주의로 자리잡는다.

이것이 천성적으로 맞지 않는 아이들은 언제나 의문을 달고 살게 되며 

결국 아무런 흥미도 느낄 수 없는 교육의 방식들에 질식한 나머지 

학창 시절의 절망감들을 승화시킬 방법을 찾지 못한 끝에

지금은 등교를 거부하는 아이들의 사례가 증가하는 이유이고,

결국 빛이 부재한 채로 죽은 시인들만 양산하는 낡은 교육제도 역시 죽음의 나선을 그린 끝에

기만적인 거짓으로 가득찬 내용들을 직관적으로 거부하는 감성충만한 신세대들에게 외면당하며

오늘날 미국식 교육제도를 채택했던 국가들의 교육시스템은 거의 대부분 붕괴하고 말았다.

이런 죽음의 시스템 와중에도 독학으로 명문대를 입학하는 고학생들의 드문 사례들이 소개가 된다.


경쟁 자체는 나쁠 것이 없는데,

심각한 상태의 폭력적 경쟁 체제와 웃고 떠들면서도 열정을 태우는 환경은 정 반대의 인재를 길러 낸다.

그리고 경쟁의 개념 자체가 아눈나키들의 방식이다.


영혼 인간은 창조된 성품 자체가 경쟁이 아니라 공존공영을 지향하는 존재이다.

2천년 전 예수는 

모두가 손가락질 하던 매춘굴의 여인들과 불가촉 천민으로 취급당했던 사마리아의 여인으로부터 

로마에서 돌아오는 여행길에 만난 여러 계층의 사람들, 그들 중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에 대이르기까지 항상 똑같은 방식으로 모든 이들을 대했고


각각의 만남들 속에서 예수는 인간들이 잃어 버리고 망각한 

지식 자체가 아닌 인식의 방법들이 통시성과 통합성을 지향하도록 하는 참된 지성적 접근 임을 일깨우고자 하는 내용들로

대화를 나누며 전하고자 했던 것 임을

예민한 이들은 행간으로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역사의 현자들이 그들과 대화를 나눈 모든 경우들에 항상 깃들어 있는 방식이고 

이것을 변형 시키려 하거나 이해의 수준에 맞게 편집을 했던 바가 존재하지 않는다.

...


언젠가도 언급했던 것 같은데

인식과 앎의 완성은 체득의 형태로 오는 것이지 기억의 조각들로 장식한 크리스마스 트리와 같은 것이 아니며,

결국 아는 것과 그리 되는 것이 큰 갭을 지닌 이유이고,

그리 되는 것과 그리 느끼는 것 역시 하보나에서 중앙섬의 해안가 거리 만큼 멀고도 가깝다.


모를 때가 기회이고, 

알고 있다고 여길 때는 의심 할 때 임을 안다면

그 사람은 진정한 현자일 것이다.


5차원 레이어에서 전개되는 과정들이란,

알고 있는 것을 리뷰하는 것이고

대부분이 버려지는 것들임을 확인 하는 것이며,

참된 지성이 낳은 통시성과 통합성을 주춧돌 삼아

신으로 회귀하는 방법론들을 

내재하는 신성 자기성질을 수용하고 따르는 지혜를 체험해 나가는 과정들을 의미한다.


예수나 로드 붓다의 대화법은 라즈니쉬 처럼 관념적이거나 복잡하지 않다.

투명하게 맑은 거울은 항상 있는 그대로를 비추이되, 

그 온기와 온화함이 부정성을 빛으로 바꾸도록 하는

보이지 않는 정감의 에너지를 공유하고 안내하는 것이며

그것이 천상의 신들의 사랑의 방식이다.


따라서 인간의 참된 지식은 그들의 가슴이 열렸을 때에만 얻어지는 열매이고

생각 보다 매우 심플하고 단순하다.

이것이 예수가 어린아이들이 천국의 상태에 가깝다고 말했던 이유이고

순수의 가치를 얻기 위한 멀고 먼 길을 돌아가는 복잡한 진화적 성질의 이 행성의 모습들 속에

그 자녀들은 조용히 앉아 있다.


그리고 때가 이르렀으므로, 순서대로 일어나 걷는 시점에 다가가고 있다..